歴史
50만 평방미터 캔버스에
시대의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가 그린 그림,
그것이 미후네야마 라쿠엔.
때는 전국시대. 다케오에서는 12세기경 간토에서 이주한 고토 씨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에도 시대 초기에 히젠노쿠니(현재의 사가 지방)의 실권이 류조지 씨에게서 나베시마 씨에게 옮겨갔을 때, 고토 씨는 그 가신이 되어 나베시마로 개명. '친척 동격'의 중신으로 나베시마 본가를 섬기는 한편, 사가 번 다케오령의 자치를 시행했습니다.
다케오 나베시마 가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제28대 다케오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1800~1862)입니다. 쇄국 시대에 적극적으로 난학을 도입하고 서양식 대포와 증기선 제조에 성공하는 등 일찍이 서양의 군사・과학 기술에 주목. 후에 '사가의 일곱 현인'이라 칭해지는 제10대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1814~1871)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다케오 영주는 현재의 다케오 고교 위치에 있던 쓰카사키조(다케오 성)에 거주했습니다. 배후에는 진구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오던 길에 배(일본어로 '미후네')를 묶어두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다케오의 상징, 해발 210미터의 미후네야마가 우뚝 솟아있습니다. 그 미후네야마의 낭떠러지를 배경으로 시게요시가 약 3년의 세월에 걸쳐 1845년(고카 2년)에 완성한 것이 미후네야마 라쿠엔(구 하기노오엔). 15만 평에 이르는 웅장한 지천 회유식 정원입니다.
조경에 앞서 시게요시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막부의 어용 화가를 지낸 가노 파 화가를 교토에서 불러들여 요즘 말하는 완성 예상도를 그리게 했습니다. 스스로 가노 파에게 배워 '가이슌사이'라는 아호로 많은 작품을 남긴 시게요시, 마음속에 그리던 정원의 이미지를 상세히 전했음에 틀림없습니다.
Nabeshima Shigeyoshi
나베시마 시게요시
에도 시대 말기
제28대 사가 번 다케오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는 그 생의 전반에는 사가 번의 우케야쿠(번 관련 공무를 총괄하는 집정직)로서 번의 재정 개혁을 담당하였으나, 덴포 3년(1832년)에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전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리나오의 에도 상경을 맹렬히 제지하다 우케야쿠에서 파면되었습니다.
생의 후반에는 다케오령으로 돌아와 덴포 5년(1834년), 일본 봉건 영주로서는 최초로 다카시마 슈한의 제자로 들어가 서양식 포술과 과학 기술을 연구함과 동시에,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막부 말기 사가 번의 고도의 군사력・기술력 개발에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덴포 10년(1839년), 시게요시는 7세의 적자 나베시마 시게하루에게 다케오 영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은거하였습니다.
다케오의 상징,
미후네야마.
그 옛날, 진구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올 적에 배(일본어로 '미후네')를 묶어두었던 것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는 해발 210미터의 미후네야마는 사가 현 타케오 시의 상징입니다.
예부터 학교 교가 등으로도 읊어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습니다. 고요히 서 있는 아름다운 산봉우리 미후네야마의 모습에서 기품마저 느껴집니다.